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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천재의 사람 - 기센 사람들일반 정보 2024. 1. 18. 02:19
# 애증의 골프
골프!
아! 애증의 골프!
남들은 골프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데 실력이 안 늘어서 애증이라 하더라.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못 본 사람과 정략결혼 후에 애정을 붙여야 하는,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애증 같은 것.
아이고 이거 난 왜 골프를 이제서야 해야 하는가.
골프를 시작하는 계기 설문조사를 보니 아래와 같더라.
>골프족이라고 밝힌 직장인을 대상으로 그 시작 계기(중복응답)를 물었다. 가장 많은 응답은 ▲동료와 상사 포함 비즈니스 관계자의 권유(43.2%)로 자의보다 타의로 인한 시작이 절반 가까이 됐다. 다음으로는 ▲골프가 재미있어 보여서(33.7%) ▲운동을 하고 싶어서(27.9%) ▲가족 권유(20.0%) ▲직업상 필요(17.9%) 등이 뒤를 따랐다.
다들 그렇구나!
나는 골프를 시작하는 압력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1. 동료와 상사의 정말 지속적인 권유
2. 직업상 필요할 확률이 점점 높아짐
3. 가족의 권유, 왜 늙어가는데 왜 골프 아직도 안 치니
4. 운동을 하고 싶어서는 순위에도 안 든다, 차라리 다른 운동을?
5. 골프가 재미있어 보여서, 내 기준에는 정적인 야구도 지루해 보여서 더 정적인 골프가 아직은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1번 동료-상사와 2번 직업상 필요성이라는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인 이유는,
한 15년 전 2개월 강습 받다 포기,
다시 9년 전 2개월 강습 받다 포기,
다시 3년 전 2개월 강습 받다 포기의 반복이다.
'골프장 가자!? 오케이!' 필드에 나가야 해서 억지로 강습을 시작!
필드 갔다 와서는 별 흥미를 못 붙이고 바로 포기!
아무래도 외적인 동기 요인으로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차라리 운동을 하고 싶어서
아니면 골프가 너무 재미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점점 꼰대로 농익어가니,
오히려 나에게 잔소리하는 상사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인제 누구한테 잔소리를 해야 하는 위치구나 싶어서 다시 위기의식을 느낀다.
명목상 '양반 체면에 골프는 쳐줘야지'하는 상황이 점점 조여오는 데,
그럴 때마다 '저는 골프 못 칩니다!'라고 하면서 압박을 빠져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내가 골프 하게 생긴 관상인 가보다.
'어째 내가 골프 할 관상인가?'
게다가 이전에는 비즈니스 개발이나 영업 관련 이리저리 빨빨 거렸더니,
당연한 듯 골프 얘기를 하고 나는 못 치는데...
그러면 어색한 공기 살짝 피어오르며 '아... 골프 안 하세요? 아 안 하시는구나... 그렇구나... 그랬어... 그렇고말고'
역시 1번과 2번 이유 같은 외적 동기보다 내적 동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다 요새 골프를 시작하는 계기 4번!
'운동을 하고 싶어서' 때문에 이제는 골프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농구, 영광의 시대는 갔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점심을 했다.
꼰대였다.
역시 우리네 꼰대들답게 슬램덩크 얘기를 했지.
슬램덩크:더 퍼스트 여운이 여전히 몸에 배어있어서,
둘이 소화시킬 겸 여의도 공원에서 농구공 하나 빌려서 슛 좀 쏴봤다.
역시.
이 소리야! 에어볼!
젠장.
농구장은 오랜만이지만 몸이 놀라울 정도로 중력 친화적으로 변했는지 도무지 점프가 안된다.
점프도 안되고 슛도 안되고 이제는 격렬한 운동은 못하는 것인가?
나는 격렬한 운동,
에너지 발산형 운동을 좋아한다.
달리기, 수영, 농구, 축구 막 하고 나면 지치는 것들.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을 요구하는 에너지를 집중하여 한곳에 수렴해야 하는 것들을 답답해한다.
예를 들어, 야구의 수 싸움 전략 등에 재미를 못 붙인다.
당연히 야구장은 인생에 딱 두 번 가봤나.
보면서도 무슨 재미인지 잘 모르겠었고,
속으로 '콜로세움 같은데 차라리 배트와 공을 가지고 미식축구처럼 서로 치고받고 땅따먹기처럼 하는 게 더 재미있지 않나' 생각을 했을 지경이니 말이다.
어쨌든,
씁쓸하게 농구 코트를 나오며,
아 진짜 피지컬 중심적인 운동은 못하겠구나 생각과 함께,
10년 전 상사가,
'에헴, 늙어서 할 수 있는 운동은 골프밖에 없을 것이다으다으다으' 라고 계속 권했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 이제는 피할 수 없겠구나 싶더라.
그래서 뭐 바로 동네 골프연습장에 갔더랬지.
아... 다시 또 이 사이클의 시작인가.
등록, 포기, 등록, 포기, 등록...등포등포...
참 근데 이 글은 골프 얘기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기센 사람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서다.
# 영업을 잘했던
골프 연습장에 도착하니 언제나 그렇듯 프리세일즈를 담당하는 실장이 인자한 얼굴로 두 손을 활짝 편다.
편의를 위해 이 양반을 '왓 데이먼'이라고 부르겠다.
왓 데이먼 :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 : '골프를...스타또!'
20여 분간 공 소리 땅땅 치는 시설을 둘러보고,
본격 레슨 과정과 비용을 얘기하기 위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결론은 3달 결제했다.
근데 상담하는 실장 양반이 좀 흥미로웠다.
사원대리 시절 만났던 영업 부장이 떠오르다.
내 기준에서 정말 기센 사람이어서 기억에 있다.
#기센 사람의 정의
인터넷에 '레알 기센 사람'이라는 밈을 본 적이 있어.
내가 딱 생각했던 기센 사람의 모습인데,
이런 이미지를 갖게 해준 게 그 영업 부장이다.
편의상 막시무스 부장이라고 하자.
영화 독전에서 이런 기센 사람에 대한 대사가 하나 나온다.
마약 세계를 다룬 누아르 장르이며,
고 김주혁 씨의 유작이기도 하며 마약왕 진하림으로 나와서 정말 약 빤 연기가 일품이었던 작품이다.
여기서 류준열이 마약 조직의 조직원으로 중국 마약 왕인 김주혁과 거래를 트려는 장면이 나온다.
마약 영화에서 늘 보듯 마약왕은 듣보잡의 접촉을 무척 싫어한다.
마약왕 진하림(김주혁)은 편집증에 말이 안 통하면 그냥 다 죽이는 스타일인데,
락(류준열)은 마음이 들어서 거래를 트려고 하면서 얘기한다.
진하림 : "니들이 나를 안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저 새끼 길림성에서 개밥으로 뿌릴 수 있었다. 근데 이 새끼는 넘치는 데가 없어. 괜~찮아. 실무자가 이런 맛이 있어야지"
넘치는 데가 없는 것.
이게 참 쉬운 것 같은데 정말 살면서 보기 쉽지 않다.
나는 넘치는 데가 없는걸 추구하지만 나도 모르게 넘치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나도 모르게 좀 나댄다.
왓 데이먼 골프 실장이 딱 넘치는 데가 없는 스타일이더라고.
그래서 과거 막시무스 부장이 떠올랐지.
정말 딱 넘치지가 않는 스타일의 전형.
원래 말을 정말 잘하고 혹하게 하는 사람에게 '영업이 체질이네' 하잖아.
좋은 뜻으로 '넘치는' 사람들이지.
나도 꽤나 넘치는 스타일인데,
영업할 일 있으면 엄청 말발 세우고,
중간중간 '나 잘났어' PPL 멘트를 쉴 새 없이 넣는다.
어떻게든 자기 자랑을 비집고 집어넣으려고 한다.
게다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쉬운 설명으로 상대를 피곤하게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나 쉽게 잘 설명하지' PPL 넣는 거지.
막스무스 부장을 내가 사원 때 봤었는데.
나는 갑 입장이었고 막시무스 부장은 영업 부장이었다.
막시무스 부장을 처음 만나기 전,
내 사수가 미리 소개를 하더라.
"막시무스 부장을 만날 건데 정말 진정한 영업인이다"
세일즈 말 다 믿지 말라고 말하던 양반이 그런 신뢰를 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라니.
진정한 영업인?
말발이 정말 좋나?
호구 당하지 않게 조심해야지 하면서,
머릿속에서 만리장성을 쭉 세우고 성벽에 지독한 회의주의자들을 포진 시켰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굉장히 평이하고 온화한 얼굴에,
회의 내내 진짜 정말 넘치지 않는다라고 밖에 말하기 힘든 톤을 유지한다.
업무상 많은 국내 에이스급 세일즈를 많이 만나보는데,
대부분 에스키모에게 얼음 잘 팔 것 같은 말솜씨에 그에 걸맞은 필드 지식을 가지고,
공작새가 꼬리깃를 펼치듯 촥 펼친다.
보통 같으면 '아 잘난척하네 재수 없네' 생각이 들 테지만,
내가 만난 양반들이 워낙 영업의 에이스들이라 그런 위화감은 전혀 없긴 했어.
그냥 넘치고 화려한 양반들.
그 와중에 막시무스 부장은 설명하기 참 어려운 묵직한 내공과 여유가 있더라.
마치 요리 예능 한식대첩에서,
온갖 진귀한 재료들 중에 강원도 대표팀이 곤드레 나물을 가지고 우승하듯 그런 느낌이다.
곤드레 나물!
Q. 4회까지 가장 맛있었던 요리를 꼽는다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가장 맛있었던 한식요리는 무엇일까? 현돈PD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으로) 1회 우승했던 강원도팀의 곤드레 요리가 정말 맛있었다. 곤드레밥과 곤드레 가자미 조림, 소고기 곤드레 말이 편채, 곤드레순 초무침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 것 없이 맛이 완벽했다. 심사위원들께서도 종종 곤드레 요리는 언급하시곤 한다”고 전했다.
-한식대첩 PD 인터뷰 중-
평범한 나물에서 이런 맛을 끌어냈다는 찬사로 우승을 했지.
막시무스 부장은 뭐랄까 평범한 말로 전체 회의를 잘 리드하고,
이 미묘한 균형을 너무 딱 맞춘다랄까.
특히 내가 회의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맬 때!
어떤 것을 설명할 때 잘난척한다는 느낌이 전혀 안 나지만,
필요한 것 내가 들으면서 떠올리는 의문을 묻기도 전에 팍팍 한가운데 스트라이크를 꽂는다.
전문적인 설명 과정에서 '나 잘 알지', '나 좀 쩔지' 같은 간접적인 PPL을 전혀 없다.
소위 극의 전개를 전혀 흩트리지 않는다.
내가 정말 예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착각마저 생길 정도로 부드러운 주입식 교육법이더라.
# 왓 데이먼 제법이군
골프 연습장 왓 데이먼 매니저도 비슷한 면이 있어.
등록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잠깐 고민하는 포인트를 굉장히 잘 파악하는 것 같다.
고민하는 타이밍에 필요한 정답을 주는 느낌?
레슨 정책에 대해서 안내하면서 아프거나 사정 있으면 수강 일을 미룰 수 있다는 항목에서,
내가 딱 잠깐 '아 곧 출장인데 어쩐다'라는 생각이 떠올라 표정이 순간 멍했다.
한 1초?
갑자기 바로 '혹시 조만간 어디 가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묻더라.
그래서 5월에 2주간 출장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니,
바로 달력을 펼치고 같은 돈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레슨 및 연습을 할 수 있게 짜주더라.
옛날 막시무스 부장이 그랬거든,
회의 중간에 모르는 내용이나 개념들이 나와서 내가 조금 헤매고 있으면,
-당시에는 사원 나부랭이인데 자존심만 세고 기고만장해서 모르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내적으로만 고민했었다-
갑자기 개념들을 풀어 준다.
게다가 이렇게 시작한다.
'잘 아시겠지만', '반복해서 지루할 수 있으나' 같은 오리털 쿠션 멘트를 치고 설명한다.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거 같다.
내가 그때 보면서 나도 좀 나대지 말고 자중하자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 뒤에 여전히 설치다,
부팀장에게 '노모벳 씨, 좀 뭐 나대기 전에 이게 왜 이렇게 되어있는지 좀 먼저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리까지 들었지 뭐.
내가 문화대혁명 선두에 설 그런 스타일이었거든.
뭐든 바꿔!
막시무스 부장 쪽 회사는 여러 문제들이 터져서 민감한 사안이 많았다.
그럴 때면,
회사 부서장이라든지 팀장들이 직접 막시무스 부장 불러다가 다그칠 때가 많았는데,
이 양반들도 워낙 업력이 있다 보니 전략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미친놈처럼 굴다가,
냉정한 협상가가 되었다가 분위기를 바꾸면 페이스를 흔든다.
그런데 막시무스 부장은 사람이 조곤조곤 부드럽게 대꾸하는데,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탈압박과 동시에 그 포악하던 팀장이나 사수들을 컴 다운 시키며 전체적인 템포를 늦추어 회의가 진행된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런 게 진정 기센 사람이구나 싶더라.
위에 있는 기센 사람 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지.
# 많이 배웠수다
첫 직장 업무가 소위 갑 오브 갑이라,
사원대리 때 갑질에 중독되어 막 나가는 동기들도 있었는데,
나는 상대가 막시무스 부장이라서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던 거 같다.
자기 주관이 분명하고 단단한 중심이 있으면,
굳이 발톱과 가시를 세우지 않아도 편안하고 온화한 어조로도 존재감을 보여주고,
워낙 자신이 있으니 우리 쪽에서 무리한 억지라든지 말도 안 되는 요구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대응하는 모습에,
저게 진정한 상남자구나 싶었다.
나도 평생 상남자가 덕목을 키우려 하지만 잘 안된다.
메뚜기 종류는 정말 안 외워진다.
쉽지 않다.
한심하게도 뭐하나 이룬 게 없다.
여하튼 골프장 왓 데이먼 실장이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짧은 만남으로 알 순 없지만,
덕분에 막시무스 부장의 기센 중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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