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천재의 명분 - 다이어트, 러닝, 인빈시블3 그리고 명분일반 정보 2024. 1. 16. 01:45
# 15년 그리고 1.5초
'아하하하하, 길에서 봤으면 몰라볼 뻔했네, 캬하하하'
내 앞에 어깨 흔들릴 정도로 쾌활하게 웃고 있는 여성은 내 첫 직장 동기이다.
한 15년 만에 만났나?
내가 준비한 15년 만의 반가운 멘트를 날리기도 전에 1.5초 만에 이 리액션은 무엇이란 말인가?
뒤이어 하는 말.
'와, 살이 찌시긴 하는 군요. 진짜 안 찌던데'
끄응... 역시다.
가만 보자 15년 전에 만났으니 흐음.
그 사이 15% 정도 몸무게가 늘었다.
하지만 근육이 급격히 빠지면서 살이 찐 거라 부피와 체적 관점으로 보면 한 30% 차이 날 것이다.
15년 만에 보게 된 것은 내 첫 직속 상사가 옛 놈들 한 번 모여보자 소집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분이 첫 팀장 되었을 때 처음 받은 첫 신입사원이어서 나름 의미가 있었을 터.
총 4명이 모였다.
4년 만에 보는 첫 직장 팀장님,
15년 만에 보고 못 알아볼 뻔한 여성,
나,
그리고 3년 만에 대학 친구이자 직장 동기인....
어랏?
근데 이 친구를 보자마자 '너 그 동안 무슨 일 있었냐? 얼굴이 반쪽이네.''
나와 다른 의미로 못 알아볼 뻔했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샤프해졌지?
이거 완전 날쌘돌이인데.
물어보니 현재 스펙이 손흥민이다.
183/77
끄응.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곧이어,
'오랜만에 보니 사진이나 찍읍시다' 하면서 종업원에게 부탁하여 사진 한 방을 박고,
카톡으로 공유되었다.
사진을 클릭하여 보는데 '하아... 이게 나라고?'
3명은 다들 그때 그 시절보다 더 샤프한 데 나만 카메라 확대 왜곡 현상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 웃으며 사진 찍을 때가 아닌데...
그동안 다들 같이 살찌는 사람들끼리 보다 보니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천천히 중량이 늘어서 애써 무시해 왔던 현실이다.
올림픽 복싱 체급 기준으로 나는 현재 라이트 헤비급은 진작에 넘어가고 묵직한 헤비급 이다.
라이트 헤비급 되었을 때도 '어랏? 설마' 했는데 헤비급은 금방이더라.
이 친구의 샤프한 모습에 놀란 이유는,
3년 전에 봤을 때 슈퍼 헤비급이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세 자리 찍겠구나! 얘기했었거든.
근데 오늘 3년 만에 20대 때 처음 봤을 때 모습이 되었으니 놀랍더라.
'아니 너 도대체 어떻게 살을 뺀 거야?'라는 말에,
나 몇 년 전부터 러닝을 시작해서 미들급까지 갔었는데,
나이 먹고 너무 마르면 없어 보여서 일부러 근육을 키우려고 라이트 헤비급 몸무게를 유지 중이야.
운동까지 다시 시작했다고?
보통 자신과 완전히 다르면 남의 일 같아서 별 다른 자극이 없는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면 배도 좀 아프면서 어랏 나도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잖아 들잖아.
내가 왜 이렇게 호들갑 떠는지는 둘 다 미들급 대학 시절부터 알아서 그렇다.
체형도 비슷하고 운동 좋아했던 것도 비슷했던 시절에 만났는데,
나는 가지 않은 길의 시에 나오는 '아재로 향하는 길'을 걸었고,
이 녀석은 '아재로 향하는 길'을 달렸다가 급격하게 유턴했으니 말이다.
'아... 가지마 친구야, 너만 날쌘돌이의 길로 가냐? 배신자 녀석아!'
# 미들급 체급의 대학 시절
대학교 시절 체육 행사를 하면,
과에서 이 친구와 내가 과 대표 선수로 대부분 출전을 했었다.
축구든, 농구든, 계주, 트레킹, 여학우 안고 뛰기, 숏 마라톤 등등 뭐 온갖 경기들 말이다.
나와 이 친구는 둘 다 중학교 때 까지 진지하게 운동을 했었기에 운동 능력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수영, 뭐 이 친구는 육상 하다가 축구?
물론 둘 다 재능 세계의 벽을 한 번 만져보고,
'이 곳엔 괴물들이나 들어갈 수 있구나' 하고 깔끔하게 입구 컷 당하고 장래에 운동 관련 진로 옵션은 싹 지워 버렸다.
일반 사람이 재능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느껴보려면 진지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회를 한 번 나가보면 된다.
어린 시절 천식 때문에 살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수영을 다녔다.
호흡기 문제로 응급실에도 몇 번 실려 갔던 터라,
수영으로 폐활량을 키워야 했다.
다른 의미로 생존에 집중하다 보니 폐가 정상을 넘어 엄청나게 좋아졌었다.
유치원 들어가기 전부터 중학교까지 꾸준히 수영 강습을 받았으니 말이다.
중학교 정도 되었을 때는 수영 성인 최상위 반이나 아마추어 대회 준비 반에서 강습을 받을 정도였다.
당연히 중학생 애들 중에는 제일 빨랐고 주특기인 평형은 웬만한 남성 성인들에게 뒤지지 않았었다.
마침 당시 체육 선생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수영부를 만들어서 수영 특기생을 키우려고 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단지 어느 날 갑자기 체육 선생이 현상범 사냥꾼처럼 돌아다니면서 몇 명을 체육실로 끌고 가서,
'너는 오늘부터 수영부고 대회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했을 뿐.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거지? 했더니만,
체육 선생들이 동네 모든 수영장에 잘하는 애를 추천받고 조사해 갔더라고.
그냥 방과 후 수영 정도가 아니라,
등교 하기 전 새벽 5시 반에 빈 수영장에 모여서 2시간 이상 훈련을 하고 아침 먹고 학교 가는 생활을 했다.
아 진짜 내가 무슨 태릉인도 아니고 중학생이 뭔 새벽 5시란 말인가.
게다가 난 주 종목이 평형이라고 하체 힘을 길러야 된다면서 물 위에서 종일 오리걸음 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어쨌든 결국 동서울 수영장에서 목표로 했던 대회가 열렸다.
진지한 대회였는지,
웃고 떠드는 분위기 보다는 다들 진지한 얼굴의 중학생들과 감독들이 득실거렸다.
자 드디어 평형 400미터!
내 차례다.
수영장 다이빙 대에 서서,
레디! 땅!
결론적으로 중간 이상은 했어.
하지만 충격도 받았다.
상위 애들의 압도적인 속도에 말이다.
내가 평형 200미터와 400미터 그리고 계영에 나갔던 거 같아.
내가 1등을 할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혹시 전국체전? 이라는 망상과 반 여학생들의 러브레터를 받는 뭐 그런 중2병 생각은 잠깐씩 했었지.
중학생 레벨 경쟁자들이 빨라 봐야 동네 마스터스 수영반 1번 형들 속도일 거로 생각했지.
게다가 평형 400미터 같은 중거리는 내가 체력이 좋아서 시간이 갈수록 성인들을 따라잡았거든.
그런데 대회에서 나 정도 덩치의 중학생들과 하는데 턴을 할 때 마다 1등과 거리가 벌어지더라고.
아무리 봐도 나 같은 중학생 꼬꼬마인데 분명 수영장 에이스 형들보다 빠른 느낌이었다.
최소한 형들은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1등 한 중학생 또래는 절대 못 이길 것 같더라.
뭐랄까 이미 메시 같은 신계의 애들이 있고 나머지 인간계 애들끼리 아귀다툼하는 꼴이라고 할까.
내가 생각했던 정도를 훨씬 상회하니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속도인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좌절도 안 했었다.
이 정도로 어나더 레벨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감탄만 할 뿐.
뭐 정우성 지금은 차은우, 박보검 같은 사람보고 같은 남자지만 그냥 '헤에~'' 감탄만 할 뿐인 것처럼 말이다.
# 안심했단 말이다
당시 나는 학업에 좀 지장이 될 정도로 준비했었지만 포기해야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 친구는 육상을 준비하다가 축구로 추천받았던 터라,
학업까지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능의 벽을 한 번 만져보고 바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뭐 하여튼 둘이 체형도 비슷하고 운동도 좋아해서 같이 잘 놀았고,
점점 취업 시기가 되니 술 먹고 퍼지고 밤새고 하니 서로 몸무게가 슬슬 늘어나며 몸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계속 농구를 했던 터라,
아무것도 안 했던 이 친구가 나보다 3~5kg씩 앞서갔다.
주기적으로 볼 때 마다 몸무게 최고 기록을 경신하더니 드디어 슈퍼헤비급 몸무게까지 다다르고.
3년 전 해외 발령 전 마지막 봤을 때,
'세 자리가 될 것 같아'라고 후덕한 아저씨가 돼서 얘기하더라고.
그 절세 미남 안정환도 살찌면 완전 아재가 되는데,
우리 같은 일반인은 뭐 감당 안되지.
나도 맨날 드러눕고 뒹굴뒹굴 하면서 땀 흘리기 싫어서 게으름 피우며 나잇살 먹었지만,
복근까지 있던 이 친구가 이렇게 아재 되는 걸 보면서,
그래 뭐 시간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어 하면서 시간이라는 절대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야밤에 치킨, 피자 축배를 끝없이 들었었지.
그러다가 이날이 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갑자기 다시 샤프해진 모습,
같이 찍은 사진에서 나 홀로 아재 중에 상아재 풍모가 되어있으니 각성하게 되더라.
'아, 살은 빠지고 몸은 다시 샤프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에 꽝하고 울렸다.
눈앞에 최고급 소고기 코스가 펼쳐졌지만 젓가락 속도부터 조절이 되기 시작하더라.
첫 팀장님이 퇴직 후 개인 사업 대성공하셔서 볼 때마다 최고급 소고기를 사주신다.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면 겨울잠 자기 전 곰 마냥 어마어마하게 먹었겠지만,
문득 자중 하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야, 니 어떻게 살 뺐는데?'
'매일 달린다. 10km씩 뛰고 있어'
# 리커버리 운동화
러닝이라.
한강 변에 러닝 하는 사람을 볼 때는 나는 벤치 널브러져 다리 한 짝 올리고 음악 들으면서 '아이고 이 더운 날 사서 고생들 하시는구먼, 리스펙트'하면서 개미를 보는 게으름뱅이 베짱이 같은 시선을 던졌었다.
그런데 러닝이라.
체력은 그렇다 치고 내 무릎이 버틸지가 걱정이다.
지금 내 몸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내 농구를 그만둔 이유가 바로 이 무릎 때문이었거든.
농구를 기술보다는 피지컬로 했던 터라,
급발진, 급제동, 리바운드를 격렬하게 하다 보니 모든 힘이 무릎에 집중되어 고생했다.
무릎 핑계로 안 하다 보니,
뛰는 것 보다 걷는 게 편하고,
걷는 것 보다 앉는 게 편하고,
앉는 것보다는 눕는 게 편하고,
그냥 눕는 것 보다 유튜브에...
젠장.
동네 러닝 하는 사람들을 보며 정대만 마냥 캔 커피 벌벌거리며 따며,
아 드디어 나도 그날이 온 건가.
선배들이 얘기했던 '하하하, 야 이제는 살기 위해 운동하는 거야, 보기 좋아지려고 운동할 시기는 지났어.'
살기 위해 운동이라.
가만 내가 전력 질주를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였지?
그래 나도 오늘부터 결심했어!
하고 바로 시작한 것은 유튜브에서 '러닝'을 검색하고 다시 드러누워 2시간을 보고 있다.
'으악' 이불킥 한 번 차며 이건 본말이 전도 되었잖아! 외쳤다.
10분 달리려고 2시간 동안 러닝 유튜브를 보고 있다니.
다음 날 아침에 눈 떴을 때.
'그래, 나도 러닝 해야겠어'라는 결심했다.
2시간 동안 유튜브에서 본 것 중,
내 소중한 무릎을 보호할 만한 운동화 하나는 기억했다.
나이키 인빈시블3.
러닝의 심오한 장비 세계는 내가 다 알지 못해도 일단 무릎 보호가 급선무였다.
인빈시블,
이름 하나 좋네, 벌써 무릎이 단단해진 느낌인데.
Invincible - 천하무적의, 아무도 꺾을/바꿀 수 없는 (=unconquerable)
아무도 내 무릎을 꺾을 수 없어 오직 내 몸무게뿐!
젠장.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모토를 가지고,
운동할 때 그까짓 거 대충 아무 운동화나 신으면 되지라는 마인드였다.
아우 지금 컨버스 신고 달리면 기계 다리로 다 대체해야 할 것이다.
빨리 정신 차리고 인제 노후화된 육체를 자본주의로 보호해야지.
객기 부리지 말아야지.
서점에 가보면 생각이 늙지 말아야 한다. 같은 책들이 있는데,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많은 문제는 육체는 늙는데 정신이 늙지 않아서 생긴 갭에서 나온다고 본다.
내가 20대 때 술자리에서 이성에게 했던 술자리 농담들을 지금 하면 바로 철컹철컹 경찰서 한복판에 무릎 꿇고 죄송합니다. 할 일이 생기겠지.
.
.
.
.
.
.
.
.
이렇게 와이프를 설득하여 일시불로 쇼핑 지르려고 하는데,
통할 것 같은가?
흠,
내가 저번에도 책 쓸지도 모른다고 아이패드와 맥북 지른 후 유튜브만 해서 신용을 좀 잃었는데...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한 소리 들으려나...
가득차있는 건 마이너스 통장이지만 가오가 있지 좀 좋은 장비로 시작하고 싶다.
'일반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7년 아시아 위기 태국 × 그리고 중국 (1) 2024.01.16 공무원 인기 업 × 인기 다운 (1) 2024.01.16 딸천재의 러닝 - 러닝을 시작하는 그다지 근성없는 자세 (2) 2024.01.16 아이폰 통화 녹음 × SKT 에이닷 (0) 2024.01.16 싱가포르 × 딸기 (0) 202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