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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천재의 이케 - 아, 카달로그 그리고 파이트클럽
    일반 정보 2024. 1. 21. 05:15
     
     

    # 나무야 미안해?

    손끝에 서린 종이 감각이 희미해져간다.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을 산 후 부터겠다.

    회의에조차 볼펜과 다이어리 대신,

    애플 펜슬과 아이패드를 들고 간다.

    모든 메모가 0과 1 조합으로 저장되는 꼴이다.

    지하철에서 종이책을 언제 마지막으로 꺼냈지?

    지하철에서도 한 손으로 움켜진 화면으로 전자책을 읽는다.

    어느덧 나는 영풍문고를 바라보는 책 사러 가는 곳이 아닌,

    문구 쇼핑과 휴식 공간으로 여기게 된다.

    오늘 교보문고 갈까 영풍문고 갈까 고민보단,

    오늘 스타벅스 갈까 영풍문고 갈까를 고민한다.

    최 종이 뭉치를 좀 만지작거리게 되는 일이 생겼다.

    퇴근 후 이케아 카탈로그를 펼쳐보는 일이다.

    며칠 전,

    딸아이가 이케아 매장 한 바퀴 돌다 집은 이케아 카탈로그를 들고 올 때,

    가지고 오면 다 종이 쓰레기 되는 데 왜 가져오니,

    라는 말이 무색하게 내가 이렇게 많이 펼쳐 볼 줄이야.

     

    대코로나 시대에 집에 서고 앉고 눕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집안 공간 한 조각, 한 모퉁이, 한 면을 인지하기 시작하며,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네.

    이케아에 딱 봐도 쇼핑하다 싸울 것 같은 커플 조합도 -예전에는 쇼핑을 지겨워했을 것 같은 남자 쪽-,

    이케아 만들어 놓은 사건 현장 같은 공간을,

    방 탈출 게임하는 홈스 마냥 모든 가구와 소품을 살피고 있다.

    이렇게 이케아 전체에 명탐정 홈스 단체 수사 중인 것을 보면,

    나만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 듯하다.

    한편 30·40대는 머무는 공간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홈인테리어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연간 가구 판매액이 최초로 연 10조원을 넘어서며 10조1865억원을 기록했다. 특히 가족 구성원 모두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거실, 주방 등 공용 공간에 대한 인테리어 관심이 전년 동기 대비 160%로 가장 크게 성장했다. 거실 공간에 식물을 배치해 생동감과 활력을 주는 플랜테리어(Plant+Interior) 트렌드가 두드러졌고, 주방에서는 홈카페 문화가 정착되면서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한 분위기 연출을 위해 `타일, 조명, 커튼`에 대한 연관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나도 통계에 일조했구먼.

    집에 오래 머물다 보니,

    내 물건들의 무작위적으로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감을 계속 마주하게 된다.

    무척 괴로운 일일세.

    내가 이렇게까지 정리를 못한단 말인가?

    화학적인 더러움에 대해서는 민감한지라 늘 환기하고 쓸고 닦고 열심히지만,

    물리적인 너저분함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한가 보다.

    사용했던 물건들이 그냥 사용 순서로 동심원으로 바닥에 나열되어 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관대한 줄 알았는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니 여기저기 남긴 옷가지와 소지품의 족적을 마주하기 힘들어진다.

    아 정신없다.

    스스로 정리할 능력은 안되니,

    이케아 카탈로그를 보며 이케아 정리 수납함에 의존하게 되더라고.

    이케아 카탈로그 이거 재미있네.

    감자칩과 맥주를 먹으며 이케아 카탈로그의 대리 깔끔함에 취해있을 때 즈음,

    이런저런 생각이 흩 뿌려지고 모아지다,

    갑자기 영화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순간 ‘흐어억’하면서 카탈로그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이케아 카탈로그로 시작해서 국가전복 음모를 꾸미는 그 영화 한 장면 말이다.

    파이트 클럽.

    데이빗 핀처,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이 만든 세기말 걸작 명화.

    영화 시작,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치 중 하나가 이케아 카탈로그다.

    삶에 찌든 강박적인 불면증 환자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가,

    이케아 카탈로그를 보며 가구 주문에 중독된 모습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이케아 카탈로그를 보며 이렇게 얘기한다.

    "I'd flip through catalogs and wonder, 'What kind of dining set defines me as a person?"

    "나는 카탈로그를 넘기며 생각했다. '이중 어떤 식기류가 나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중에 어떤 정리함이 나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워워’하고 이케아 카탈로그를 멀찍이 치워버렸다.

    어후,

    이케아 카탈로그로 시작해서 이후 전개되는 영화 내용을 떠올리니,

    내가 지금 그 초입에 와있나? 생각이 들며 부르르르 떤다.

    과중한 업무 상황이 이렇게 나타나나?

    비싼 가구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삶에 강한 공허함을 느끼는 자동차 리콜 심사관 ‘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싸워봐야 네 자신을 알게 된다”라는 테일러 더든의 말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잭. 두 사람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폭력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파이트 클럽’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질되고, 잭과 테일러 더든 사이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 가는데…

    어 지금 이케아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의 가구인데,

    왜 당시에는 고급 가구라는 이미지로 있었지?

    여튼,

    영화 파이트 클럽에 나오는 것처럼,

    온갖 에피소드가 생기며 극렬한 무정부주의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요새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으니 정말로 이케아 카탈로그에 빠지게 되나 생각이 들더이다.

    세기말 영화 개봉 당시에는 이케아라는 회사도 모르고 브랜드도 몰랐기에 와닿지는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그 장면을 유튜브로 보니 영화를 보는 나의 해상도가 달라진 것 같다.

    해상도.

    해상도...

    왜 인문고전을 보고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가장 알기 쉬운 답인 것 같다.

    이 짤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케아라는 브랜드에 대해 경험한 후에 파이트 클럽 장면을 보니,

    이름 없는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이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이 좀 더 명확하다.

    그래 에드워드 노튼.

    그의 기분을 한 번 느껴볼까?

    다시 이케아 사이트 장바구니를 열어볼까.

    자 고른 거 한 번에 결제해 볼까?

    노튼 형,

    형의 마음을 알겠어.

    그리고 나도 질러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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